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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문화·생활 탐구

메주 쑤는 날 – 콩 삶는 냄새와 겨울 발효의 지혜

메주 쑤는 날, 마을을 가득 채우던 콩 삶는 냄새와 겨울 발효의 풍경을 담았습니다. 콩 고르기부터 띄우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한국 전통 음식문화의 깊이를 살펴봅니다.

 

 

겨울이 깊어가면 시골집 곳곳에서 유난히 진한 냄새가 퍼져 나왔습니다. 바로 메주 쑤는 날의 풍경입니다. 고소하면서도 묵직한 콩 삶는 냄새는 집집마다 겨울의 상징처럼 번졌고, 그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저 집도 이제 장 담글 준비를 시작했구나하고 서로 알 수 있었습니다. 메주는 단순한 발효 식재료가 아닙니다. 된장, 간장, 고추장이라는 한국인의 밥상을 책임지는 모든 양념의 출발점이자, 세대를 잇는 손맛의 기초였습니다. 오늘은 그 소박하지만 위대한 과정인 메주 쑤는 날의 풍경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콩 고르기와 삶기메주의 첫걸음

메주 만들기의 출발점은 언제나 콩 고르기였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히 재료를 준비하는 수준을 넘어, 한 해 장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절차였습니다. 곡간에서 꺼낸 마른 콩을 키나 바구니에 담아 흔들어 보면, 톡톡 부딪히는 소리만으로도 알이 굵고 속이 꽉 찼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들은콩이 좋아야 장맛이 난다는 말을 늘 입버릇처럼 하셨고, 아이들 역시 돌멩이나 쭉정이를 골라내며 자연스레 장 담그기의 첫 단계를 배웠습니다.

 

깨끗하게 고른 콩은 여러 번 물에 헹구었습니다. 손바닥으로 콩알을 비벼내듯 씻다 보면, 물 위로 뜨는 불순물이 걷혀 나갔습니다. 찬물에 불려 두면 콩알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작은 설렘을 안겨 주었습니다. ‘내일은 집 안 가득 콩 냄새가 나겠구나하는 기대가 그 안에 담겨 있었지요.

 

이윽고 삶기가 시작되면 집 안 풍경은 더욱 분주해졌습니다. 커다란 가마솥에 콩을 가득 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장작 타는 냄새와 함께 특유의 구수한 향이 피어올라 부엌을 넘어 마당까지 흘러갔습니다.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솥뚜껑 사이로 새어 나오는 하얀 김은 마치 온 마을을 감싸는 담요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이 냄새는 메주 쑤는 날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이웃들에게도저 집이 오늘 콩을 삶는구나라는 신호가 되었습니다.

 

콩을 삶는 시간은 짧지 않았습니다. 한두 시간 만에 끝나는 일이 아니었고, 불의 세기와 가마솥의 크기에 따라 반나절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이때 불을 지피는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아궁이 앞에서 자리를 지켰습니다. 장작을 넣는 타이밍을 놓치면 콩이 덜 익거나 눋기 때문에, 불조절은 경험 많은 어른들만이 맡을 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삶아진 콩은 손끝으로 눌러보아야 제대로 익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직 단단하면덜 익었다며 조금 더 불을 지폈고, 손가락 사이에서 으스러질 만큼 부드러우면이제 됐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작은 판별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온 생활의 지혜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솥에서 퍼낸 콩은 마당의 큰 소쿠리에 담겨 김을 식혔습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콩김은 메주 쑤는 날을 더욱 인상 깊게 만드는 장면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옆에서 삶은 콩을 집어 먹으며 고소한 맛에 감탄하곤 했는데, 그것은 어른들 몰래 즐기는 작은 보상이기도 했습니다.

 

 

찧기와 성형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메주

콩이 알맞게 삶아지면 이제부터는 메주 만들기의 두 번째 단계, 찧기와 성형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마솥에서 퍼낸 콩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상태에서 바로 찧어야 잘 뭉쳐졌습니다. 그래서 부엌 안에는 늘 뜨겁고도 분주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찧는 방식은 집집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작은 집에서는 커다란 절구에 삶은 콩을 넣고, 나무공이나 나무망치로 쿵쿵 내려치며 으깨기도 했습니다. 절구 안에서 퍼져나오는 , 소리는 메주 쑤는 날의 배경음악처럼 집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손이 모자라는 큰 집이나 대가족의 경우에는 떡메를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두세 사람이 떡메를 번갈아 내려치며 힘을 합쳐 콩을 찧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농악대의 장단처럼 리듬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옆에서하나, !”을 외치며 장단을 맞추곤 했습니다.

 

콩이 고루 찧어지면 이제 성형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김이 아직 가시지 않은 뜨거운 콩반죽을 커다란 소쿠리에 퍼 담아 한 덩어리씩 떼어내고, 양손으로 힘주어 뭉쳤습니다. 사각형 벽돌 모양으로 단단히 빚는 집도 있었고, 둥근 모양으로 빚어 올리는 집도 있었습니다. 모양은 다르지만, 그 안에는한 해의 장맛을 부탁한다는 공통된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성형 과정에서는 단순히 손으로 뭉치는 것이 아니라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표면이 갈라지지 않도록 꾹꾹 눌러 다지고, 가운데까지 단단히 뭉쳐야 발효가 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늘대충 뭉치면 안 된다, 정성을 담아 눌러라라고 아이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이런 가르침 속에서 아이들은 단순히 놀이처럼 작은 메주를 빚어보면서도 자연스레 손맛의 중요성을 배워갔습니다.

 

완성된 메주는 짚으로 묶어 고정했습니다. 짚은 단순한 끈이 아니라, 발효 과정에서 곰팡이가 자연스럽게 번식하도록 돕는 매개체였습니다. 잘라낸 볏짚을 엮어 십자 모양으로 감아 단단히 묶고, 걸어두었을 때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손질했습니다. 짚 특유의 향이 메주 표면에 배어들며 발효를 돕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과정 또한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간은 온 가족이 함께 어우러지는 작은 축제이기도 했습니다. 어른들은 진지하게 성형을 이어가면서도 아이들에게 작은 덩어리를 떼어 주며 장난 삼아너도 네 몫의 장맛을 만들어 봐라하고 웃음을 나누었습니다. 아이들이 빚어낸 메주는 비록 작고 울퉁불퉁했지만, 그 속에는 가족의 추억과 배움이 오롯이 담겼습니다.

 

메주 쑤는 날 – 콩 삶는 냄새와 겨울 발효의 지혜

 

띄우기와 건조겨울의 발효학

성형된 메주는 이제 집안의 또 다른 손길을 기다리는 발효의 시간으로 들어갔습니다. 메주를 띄우는 과정은 단순히 매달아 두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지혜와 경험이 담긴 정교한 과정이었습니다.

 

먼저 메주는 따뜻한 아랫목 근처, 혹은 햇볕이 잘 드는 곳에 걸어 두었습니다. 짚으로 단단히 묶은 메주 덩어리를 대들보나 선반에 줄줄이 매달아 놓으면, 겨울 햇살과 방 안의 따뜻한 기운이 어우러져 발효가 서서히 시작되었습니다. 짚은 단순히 묶는 도구가 아니라, 그 속에 서식하는 미생물이 메주의 발효를 돕는 천연 균 배양기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짚을 고를 때도 아무 짚이나 쓰지 않고, 햇볕에 잘 말린 볏짚을 정성스레 준비했습니다.

 

발효가 시작되면 메주에서는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알싸한 냄새가 퍼져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코를 찌르는 듯 낯선 냄새였지만, 이내 집안 가득 스며들며올해 장맛이 시작됐다라는 신호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냄새를 맡고 코를 찡그리며 장난을 치곤 했지만, 어른들은 미소를 지으며이 냄새가 있어야 밥상이 든든해지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메주의 겉면에는 노랗거나 갈색, 때로는 푸른 곰팡이가 피어났습니다. 이는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발효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곰팡이의 빛깔과 분포를 살펴보며 발효 상태를 점검했습니다. 곰팡이의 색이나 향을 통해 장맛의 농도를 미리 짐작하는 것은 경험에서만 나오는 지혜였습니다.

 

발효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메주는 장독대나 마당으로 옮겨져 건조 과정을 거쳤습니다. 겨울의 차갑지만 투명한 햇살은 메주를 단단하게 굳히며, 표면에 또 한 겹의 발효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건조 과정에서 메주는 겉은 단단해지고 속은 은근한 습기를 품게 되었는데, 이 미묘한 균형이 훗날 된장과 간장의 맛을 좌우했습니다.

 

집집마다 관리법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어떤 집은 메주가 얼지 않도록 볏짚으로 덮어 주었고, 또 어떤 집은 밤마다 안으로 들였다가 낮에 다시 햇볕에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관리법의 차이가 쌓여, 결국 같은 콩으로 빚은 메주라도 맛과 향은 달라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집집마다 고유한 장맛의 비밀이었습니다.

 

발효와 건조의 시간을 거치며 메주는 단순한 콩 덩어리에서 벗어나, 삶과 공동체의 맛을 담은 산물로 변화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겨울의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아랫목, 자연과 사람의 손길이 어우러진 생활의 발효학이자,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한국 고유의 지혜였습니다.

 

 

세대의 기억과 사라져가는 풍경

메주 쑤는 날은 단순히 된장과 간장을 만들기 위한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겨울철의 가장 큰 집안 행사이자, 가족과 이웃이 함께 모여 온기를 나누던 축제 같은 날이었습니다. 이웃집 아낙네들이 모여 큰 대야 앞에 앉아 콩을 씻고, 삶은 콩을 찧으며 흘려보내는 수다는 하루 종일 이어졌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메주가 발효되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의 마음을 발효시키는 시간 같았습니다.

 

아이들은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뛰놀았고, 김 사이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종종 어른들의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꾸중조차도 집안 가득 번지던 웃음과 따뜻함 속에서 금세 사라졌습니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던 들판과 달리, 메주 쑤는 집은 언제나 사람들의 숨결과 웃음으로 가득 찬 작은 온실 같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이러한 풍경은 점차 희귀해졌습니다. 현대에는 대형 마트와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된장과 간장이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맞벌이와 핵가족화로 인해 집집마다 메주를 쑤는 일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장독대를 정성껏 관리하던 풍경도 아파트와 빌라의 베란다에서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메주를 띄우던 짚냄새와 발효된 향은 이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할머니 댁 장독대 옆에서 말리던 메주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된장찌개 한 그릇에서 풍겨오는 깊은 맛 속에는 단순한 조미료 이상의 세대를 잇는 기억이 녹아 있습니다. 그것은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흘린 땀과 정성, 그리고 겨울날 이웃과 함께 나누었던 웃음소리까지 담은 향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메주 쑤는 풍경을 눈앞에서 보기 어렵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공동체의 연대, 세대를 잇는 전통, 생활 속의 지혜는 여전히 소중한 문화적 자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메주의 냄새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결국, 그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발효식품이 아니라 사람과 삶, 그리고 기억을 잇는 향기이기 때문입니다.


 

메주 쑤는 날의 풍경은 단순한 음식 준비를 넘어, 겨울을 지내는 지혜이자 한 해의 장맛을 여는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콩을 삶고 찧고 빚으며, 가족과 이웃은 노동을 나누고 삶의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풍경일지라도, 메주의 기억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따뜻하게 살아 있습니다. 결국 메주는 단순한 콩 덩어리가 아니라, 한국인의 밥상과 삶을 지탱한 발효의 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이어가야 할 소중한 문화적 자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