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시장은 단순한 장터가 아닌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모이는 공간입니다. 30년 넘게 떡집을 지켜온 사장님과 장날마다 노점을 펼치는 할머니의 인터뷰를 통해, 전통시장의 정겨움과 세대를 이어가는 생활 문화를 만나보세요.
도시 곳곳에 대형 마트가 자리 잡고, 온라인 쇼핑 이용이 일상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에도, 전통시장은 여전히 묵직한 생명력을 품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이야기가 오가는 특별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시장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된 간판과 손때 묻은 좌판, 그리고 그곳을 지켜온 주인들의 얼굴에서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오늘은 30년 넘게 떡집을 운영해온 사장님과, 장날마다 노점을 펴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전통시장이 간직한 의미와 따뜻한 정서를 살펴보려 합니다.
30년 떡집 사장님의 이야기
시장 입구를 들어서자 가장 먼저 코끝을 간질이는 것은 고소한 쌀 냄새와 갓 쪄낸 떡에서 피어오르는 따끈한 김이었습니다. 좁은 골목 안쪽, 낡은 간판이 걸린 떡집 앞에서는 커다란 가마솥에서 흰 김이 구름처럼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하얀 쌀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쓴 사장님이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며 떡을 빚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동작은 익숙하면서도 단단했고, 30년 세월이 손끝에 고스란히 배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전에는 명절 앞두면 새벽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곤 했지요. 그때는 하루에 수백 판씩 빚어내야 했어요. 쌀을 씻는 데만 해도 물동이 수십 개가 필요했지요. 요즘은 손님이 줄었지만 그래도 단골은 꾸준히 찾아와요. ‘사장님 떡 맛이 제일이야’라는 말 들을 때가 가장 힘이 나요.”
말을 이어가는 사장님의 목소리에는 세월의 무게와 함께, 여전히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자부심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의 떡집 하루는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됩니다. 아직 시장 골목이 조용할 때, 그는 쌀을 고르고 불리며 하루를 열 준비를 합니다. 커다란 가마솥에 찹쌀을 올려 찌고, 증기가 가득 차오르면 무겁게 달궈진 떡메로 쿵쿵 내리치며 반죽을 다집니다. 그 소리는 시장의 아침을 깨우는 신호 같았고, 이웃 상인들에게는 익숙한 하루의 배경음악이었습니다.
떡을 치는 그의 팔뚝에는 굵은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고, 손바닥은 오랜 세월 뜨거운 김과 무거운 반죽을 다뤄온 흔적처럼 거칠었습니다. 하지만 그 손길이 지나가면 매끈하고 쫀득한 떡이 탄생했고, 이는 오롯이 정성과 기술이 빚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사장님이 만드는 떡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손님들에게 그것은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빠지지 않는 동반자였습니다. 설날 차례상에 오르는 흰떡, 추석 송편, 아이의 첫돌에 쓰이는 고운 백설기, 결혼식에 손님들에게 나눠주는 인절미... 그 떡마다 사연이 있었고, 누군가의 기쁨과 축하 속에 함께하는 존재였습니다.
“돌잔치 때 떡을 맞춰 간 아기들이 지금은 장성해서 다시 결혼한다고 떡을 주문하러 와요. 세월이 이렇게 흐르는 걸 보면, 제가 만든 떡도 사람들 인생에 작은 흔적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지요.”
사장님의 얼굴에는 피곤함 속에서도 뿌듯함이 번졌습니다. 시장에서 떡집을 지킨다는 건 단순한 장사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한 지역 사람들의 추억을 지키고, 그들의 일상에 따뜻함을 더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떡집을 지킨다는 건 제 가족만의 생계를 이어가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기쁜 날, 또 때로는 슬픈 날에도 제 떡이 함께하는 거죠. 시장을 지키는 일은 곧 사람들의 삶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 말 속에서, 떡집 사장님이 걸어온 30년 세월의 무게와 시장이라는 공간의 소중함이 오롯이 전해졌습니다.
장날마다 나오는 노점상 할머니의 삶
떡집을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파라솔 하나를 세우고 장날마다 좌판을 펼치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크지 않은 자리지만, 그 위에는 정성스럽게 키운 채소 몇 단과 집에서 직접 담근 된장, 고추장, 그리고 간단한 장아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시장의 화려한 간판가게들 사이에서 할머니의 좌판은 소박하지만, 묘하게 따뜻한 기운을 풍겨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했습니다.
할머니의 손은 햇볕에 그을려 거칠고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지만, 그 손으로 꺼내는 된장 항아리와 채소들은 여전히 정갈하고 곱게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할머니께서 좌판에 앉아 있으면, 마치 오래된 시골집 마루에 앉아 있는 듯한 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지나가던 손님이 발길을 멈추고 “할머니, 된장 얼마예요?” 하고 물으면, 할머니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습니다. “많이 사지 말고 조금만 사. 집에서 먹을 만큼만 가져가. 그래야 맛이 안 변해.” 그 말 한마디에서 장사의 욕심보다는 손님을 아끼는 마음이 먼저 느껴졌습니다.
할머니는 과거의 장터 풍경을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이 장터가 북적였지. 먼 동네 사람들도 소 달구지 끌고 와서 물건을 사고팔곤 했어.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사람들 목소리, 흥정 소리,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어. 요즘은 그런 모습이 잘 안 보여서 허전할 때가 많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할머니는 손에 들린 부채로 채소 위를 살살 부쳐 먼지가 앉지 않게 하고, 된장 병뚜껑을 다시 단단히 조여놓았습니다. 하루 벌이는 크지 않지만, 가끔 단골손님들이 와서 “할머니 된장 맛이 옛날 그대로예요”라며 칭찬해줄 때마다 힘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몇 날 며칠을 지탱해주는 에너지가 된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노점상은 단순히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만은 아니었습니다. 할머니에게 시장은 세상과 이어지는 창이자 삶의 무대였습니다. 집에만 있으면 하루가 너무 길고 적막하기에, 장날이면 몸이 먼저 나와 좌판을 펴게 된다고 했습니다. “집에 있으면 말소리도 없고, 고요하기만 해. 근데 시장에 나오면 지나가는 사람과 눈도 마주치고, 말도 하고, 웃음도 나오지. 살아 있다는 게 느껴져.” 할머니의 말씀에는 전통시장이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적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이어주는 공동체라는 의미가 깊게 배어 있었습니다. 시장은 할머니에게 단순한 장터가 아니라, 외로움을 잊게 해주고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였습니다. 좌판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그 시간은, 곧 삶의 활력을 되찾는 시간이었고, 그녀가 살아온 세월을 이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주름진 미소 속에서 우리는 단순한 장사의 풍경이 아니라, 세월과 사람, 공동체가 어우러진 한국 전통시장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통시장이 가진 따뜻한 힘
떡집 사장님과 노점상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전통시장이 결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시장은 삶의 기록이 쌓이고,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살아 있는 무대입니다. 물건을 흥정하는 순간조차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가 됩니다.
시장을 거닐다 보면 단골손님과 상인이 주고받는 짧은 인사말 속에 따뜻함이 묻어납니다.
“할머니, 지난번에 주신 된장 정말 맛있었어요.”
“그래? 다행이네. 이번엔 고춧가루 조금 더 넣어봤어.”
이처럼 몇 마디 나누는 말 속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정겨움이 담겨 있습니다. 상인이 값은 조금 깎아주면서도 “다음에 또 와요” 하고 웃을 때, 그 웃음 속에는 단골을 잇는 신뢰와 오랜 정이 스며 있습니다.
전통시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 지역 공동체의 거실과도 같습니다.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와 떡을 얻어먹으며 장터의 정을 배우고, 어른들은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자연스럽게 이웃과 안부를 나눕니다. “아이고, 오래간만이네. 요새는 별일 없지?”라는 짧은 대화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외로움을 덜어냅니다. 이처럼 시장은 경제적 교환의 장소이자, 사회적 관계를 이어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대형 마트나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마트의 계산대는 빠르고 편리하지만, 그곳에서 웃으며 흥정을 하고, 덤으로 파 한 줌을 얹어주며 “맛있게 끓여 먹어”라고 말해주는 손길은 없습니다. 시장의 정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공간 속에서 비로소 싹트는 것입니다.
사장님의 땀방울, 노점상 할머니의 손맛, 그리고 손님들의 정겨운 인사말이 모여 만들어지는 전통시장은 여전히 지역 공동체의 중심으로 기능합니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의 삶이 연결되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삶의 학교 같은 공간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온라인 주문으로 편리하게 장을 보지만, 전통시장이 가진 의미는 여전히 소중합니다. 시장은 단순한 거래의 장소가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살아 있는 문화의 현장입니다. 떡집 사장님의 땀과 노점상 할머니의 웃음 속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도 전통시장은 단순히 오래된 공간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뿌리를 지켜주는 문화유산으로 계속 남아야 할 것입니다. 시장을 찾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그 가치를 지키는 작은 실천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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